도서관에서 한국 신화 관련 서적을 찾아 읽고 싶었을 때는 딱히 눈에 들어오는 책이 많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뒤적거리다 삽화가 좀 많이 실려있을 법한 이 책 『얘들아, 한국 신화 찾아가자!』를 골라 대출해 왔는데 글의 어미가 "_했지요."라는 형태의 동화에 많이 쓰일 법한 어투라서 어린이 대상 책이라는 것을 빌려오고 나서 알았습니다. 한 단원이 끝날 때마다 '생각해 봅시다'라는 코너로 해당 신화의 핵심 부분을 질문하는 형태가 있어 상당히 교훈적인 목적으로 쓰인 신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신화들 중에 교훈적인 것과는 좀 거리가 멀어 보이는 내용도 더러 있기는 했지만... 예를 들자면 신화 속 영웅들의 부모는 자식의 뛰어난 능력을 못 알아보고 내치거나 자식을 버리는 어리석은 모습으로 그려지는 경향이 크더군요. (바리공주는 암만 봐도 호구 같달까...) 어린이 대상으로 나온 책이긴 하지만 신화의 내용은 상당히 충실하게 실려있는게 특징. 어찌 보면 대개 성인 대상으로 나온 신화 심리학 서적 등에서 신화의 줄거리를 요약하느라 미처 놓쳤던 부분들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도 되었고요.
책은 크게 세 장으로 나누어져 있어 1장에는 세상이 만들어진 이야기, 즉 창세 신화를 2장에서는 사람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알려주는 신화 속 이야기, 3장에는 문화적인 측면을 다스리는 신들 혹은 영웅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창세 신화가 민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했다면 2장은 홍수 설화와 건국 신화가 같이 설명되어 있고, 3장에서는 신화 속 영웅 설화와 건국 신화 이야기가 같이 실려 있습니다. 신화적인 요소가 포함된 건국 이야기는 그 시기가 고려까지가 해당되고 아무래도 조선시대부터는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바뀌었고 기록이 활발해진 시기라 신화와 같은 허구적인 요소가 많이 개입되긴 어려웠을 거라 추정되더군요. 아무래도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 신이나 귀신과 같은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더라도 기이한 일, 사람들 사이의 불안한 심리를 드러내는 소동 정도로만 여겨졌을 것이며 시기를 따져도 신화적인 요소가 많이 걷혀진 시대일 테니까요.
책에서 다루는 창세 신화에서는 유명 웹툰에서도 언급된 창세신화 천지왕의 두 아들 대별왕과 소별왕 이야기나 미륵이 세상을 만들었으나 후에 석가에게 빼앗겼다는 함경도 창세 신화보다 앞선 좀 더 근원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하는데, 동양 신화들이 으레 그렇듯이 한국 신화 역시 절대자가 먼저 있어 세상을 만든 것이 아니라 세상이 먼저 저절로 만들어진 다음, 절대자가 출현했다는 공통점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창세 신화 중에 세상에 아무것도 없이 진흙으로만 뒤덮여 있을 때 하늘나라의 공주가 지상에 반지를 떨어뜨려 그것을 찾기 위해 하늘나라의 장수가 손으로 지상의 흙을 뒤집고 퍼담다가 땅과 바다가 갈라지고 산과 들판이 생겨 세상이 만들어졌다는 구전이 있는데 어린 시절 동화책으로 한번 접한 적이 있는 이야기지만 다른 창세신화에 비하면 서사성이 떨어져서인지 덜 알려진 설화이긴 해도 빠지지 않고 실려있다는 게 신기하더라고요.
하지만 이 창세 신화 서두 부분에서는 특이하게도 세상이 열리는 이야기만이 아닌 세상이 멸망할 때의 이야기 역시 실려 있는데(출처 : 손진태 『조선 민담집』), 여기서 묘사되는 세계 멸망의 모습은 '아주 빨갛고 커다란 태양이 떠서 하늘과 땅이 서로 붙고 맷돌처럼 빙글빙글 돌아 세상이 가루가 되고, 착한 사람들만이 맷돌의 구멍에 남아 있어서 다시 인류가 번창할 것'이라는 내용이에요. 뭔가 현대의 지구온난화 아니면 핵 전쟁, 혜성 충돌과 같은 것을 연상시키는 이례적인 내용이라 좀 놀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함경도 창세신화 부분에서 석가의 비겁한 술수로 세상을 빼앗긴 미륵의 노래가 전문 실려 있는데 이 부분도 상당히 의미심장한 지라 그대로 옮겨봅니다.
"음흉하고 비겁한 석가야 / 내 무릎에 자란 꽃을 / 네 무릎에 꽂았으니 / 꽃 피어도 열흘 못 가고 / 꽃 심어도 십 년 못 간다."
"음흉하고 비겁한 석가야 / 네 세상이 되면 마을마다 솟대 서고 / 네 세상이 되면 가문마다 기생 나고 / 가문마다 과부 나며 / 가문마다 무당 나고 / 가문마다 역적 나며 / 가문마다 백정 난다. / 네 세상이 되면 3천 명의 중이 나고 / 1천 명의 처사 난다. / 그런 세상 된다면 말세지 무엇인가?"
참고로 솟대는 학창시절 역사 시간에 배울 때 소도라는 종교 지역을 표시하는 물건이고 소도는 법이 통하지 않아 죄수가 그 안으로 도망쳐도 잡지를 못했다는 설명을 들은 기억이 있는데 마을마다 솟대 선다는 이야기는 현실의 법과 규율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많아진다는 이야기라고 해석했어요. 과부와 기생이 난다는 것은 아마 여자들이 팔려가거나 보호받지 못하는 삶을 뜻하는 것 같고 무당과 중, 처사가 많아진다는 건 사이비 종교를, 역적과 백정은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거나 천대받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의미일 듯. 미륵의 저 노래는 세상이 혼란해질 때를 비유한 거라 상당히 뼈가 있는 부분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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