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사정이 있어 TV를 보지 못하게 된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그 덕택에 재미있게 보던 『벌거벗은 세계사』나 『벌거벗은 한국사』의 본방도 놓치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나중에 재방송을 보려고 해도 묘하게 타이밍을 놓치는 경우가 다반사. 그런데 공교롭게도 오늘 TV를 켜자 『벌거벗은 한국사』 120화의 재방송을 하고 있었고, 이번 테마는 납량특집으로 조선시대에 기록된 귀신 이야기, 그것도 다섯 가지 귀신 이야기를 다룬다길래 이건 내 취향이라는 직감이 와서 그 앞을 지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동안 본 『벌거벗은 한국사』 시리즈 중에서 제일 흥미롭게 감상한 회차가 아니었나 싶더라고요. 심지어 이번 회차 테마에 맞춰 무대 구성도 바뀌었기 때문에 얼핏 보면 『심야괴담회』 같은 프로그램이라고 착각할 정도.
120화 게스트는 다문화콘텐츠연구소의 진수현 교수님. 본방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나라 귀신의 종류 중 원귀와 악귀에 대한 개념 설명이 인상 깊었습니다. 원귀와 악귀 하면 둘 다 사람을 해코지하는 종류로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원귀(怨鬼)는 생전의 원한과 억울함, 미련 때문에 이승에 남아 자신의 존재를 어필하다 본의 아니게 사람을 해치는 귀신이며 원하는 게 풀리면 사라지는 반면 악귀(惡鬼)는 자신의 악한 의도나 욕망 때문에 사람을 직접 해치는 귀신으로 대표적인 게 물귀신이 있다고요.
직접 언급되지 않지만 호랑이에게 물려죽어 희생자를 물색하는 창귀도 악귀에 포함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이번 120화에서 다루던 귀신은 첫 번째 아랑전설이나 장화홍련전의 클리셰라고 할 수 있는 원한을 호소하는 처녀귀신 기록, 두 번째 타사 드라마 『악귀』에서도 주요 소재로 언급된 사악한 저주술인 '염매' 이야기, 세 번째 난치병 혹은 불치병 치료를 위해 식인을 한 사건을 각색한 것으로 추정되는 동자삼 설화 - 내 다리 내놔 귀신, 네 번째 구두쇠 남편에게 쫓겨나 억울하게 죽은 여인이 복수하러 나타난 여귀 설화, 다섯 번째 조선시대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받들었던 천연두를 옮기는 마마신 이렇게 다섯 가지가 소개됩니다.
여기서 처녀귀신 설화나 기록은 예전 책에서 원한귀라고 해도 양반 남성의 업적과 활약을 부각시키기 위한 도구로 이용당했다는 점과 그 클리셰를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큰 흥미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민간 야사에 전해지는 원귀 이야기가 잔인하고 복수에 가차 없다고 하는데 저렇게 양반 남성이 나서서 사건을 해결하는 처녀귀신 설화는 기득권인 양반 남성을 띄워주는 구도로써 그 기록을 누구 입장에서 적었는지 확연하게 알 수 있다는 점이랄까.
그나마 소복입고 산발한 처녀귀신 형태가 현대 영화(월하의 공동묘지) 이미지에서 비롯되었고 실제 기록에서 매우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다는 점은 특이점.
반면 드라마 『악귀』에서도 언급된 염매 이야기는 다시 들어도 이야기가 소름 끼치는 구석이 있어서 흥미진진했습니다. 쫓겨난 부인이 여귀 된 설화는 그냥 남편이 ㅅㅂ놈이고 당시 남편들의 횡포에 시달린 여인들의 원한을 빗댄 게 아닐까 싶었고요. 마마신 이야기는 은근히 찾아보면 많이 볼 수 있는 내용인데 개인적으로 『벌거벗은 한국사』에서 소개된 내용보다 손님굿에 등장하는 마마신들의 이야기가 더 인상적이라는 생각.
* 참고 : 손님굿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0480
그리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동자삼 설화로 흉년과 역병이 도졌을 당시 조선시대에도 식인 사건이 번번했고 사람들이 그 죄의식을 덜기 위해 시신을 먹은 일을 실은 동자삼을 먹은 것으로 바꾸었다는 해석은 매우 신선했습니다. 난치병을 고치기 위해 식인이라는 방법을 선택했다는 건 동서양 막론으로 전해지는 사실이기도 하며, 조선시대에서도 실제로 이런 사건이 벌어졌고 시대별로 기록에 등장했다는 점이 소름이라고 할까. 식인 기록을 신성한 열매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왠지 『서유기』 속 인삼과 에피소드와 유사하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역시 사람들 하는 짓은 어느 나라건 비슷한 구석이 있다고 할까...
또 이번 120화에서 간간이 인용되는 다른 방송사 영상들도 눈에 띄었는데 그중 오컬트 드라마 『손 the guest』나 예전에 인기 많은 시리즈였던 『전설의 고향』이 등장하는 게 반가웠습니다. 하지만 『악귀』도 등장할 법하면서 나오지 않은 건 좀 아쉽더라고요. 『악귀』는 비교적 최근 드라마라 그런 거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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