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소녀를 사랑하다』는 제목을 보면 대충 내용을 예상할 수 있을 듯합니다. 하지만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사춘기 시절 지나가듯 미묘하게 겪는 감정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 같은 소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여자 아이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요. 예전에 이 작가의 단편소설을 읽고 이 책을 읽게 되었는데 제가 본 『앰 아이 블루』라는 청소년 동성애를 다룬 소설집에서 이 책의 저자인 '낸시 가든'의 소설이 한 편 실려있었거든요. 『소녀, 소녀를 사랑하다』를 보게 된 이유는 그 단편집 덕택이었는데 단편 소설집에 실려 있는 작가의 글에 따르면 『소녀, 소녀를 사랑하다』의 원제는 『내 마음의 애니 Annie on My Mind』입니다. 원제가 뭔가 더 아련한 맛이 들어 좋긴 하지만 그 제목 만으론 독자를 확 끌어당기기는 힘들기 때문에 번역 당시 제목을 저렇게 바꾼 건지도 모르겠군요.
이 책의 주제가 소녀들의 동성애이기 때문에 얼핏 자극적인 걸 바라고 호기심으로 빌려볼 수도 있지 않나 싶기도 하고 어린 소녀들의 성장소설 정도로 착각할 수 있지 않나 싶지만 소설은 그 두개의 편견을 뛰어넘습니다. 주인공인 리자와 애니는 서로 우연히 만나 조금씩 애정을 키워가고 결국 자신들의 성정체성을 자각하면서 주위의 편견과 반대에 부딪히고 곤경에 빠지기도 하지만 결국 그것에 맞서가면서 자신과 서로를 지켜나가는 이야기로 축약할 수 있겠네요. 동성애라고 하지만 소설에서 그려내는 그녀들의 사랑은 다른 사람들의 사랑과 일반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우연히 만났다가 서로 마음이 잘 통하는 걸 알고 같이 있으면 기분이 좋다는 것을 알다가 점차 그것이 사랑으로 발전하는 거죠. 자극적인 장면도 그다지 등장하지 않고요.
하지만 둘의 사랑이 단순 사춘기 소녀들이 겪는 착각은 아니며 소설은 그 주제를 잃지 않습니다. 소설의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일단 주인공인 리자는 어느 정도 중산층이며 좋은 학교에 다니고 또 다른 주인공인 애니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지요. 이 둘은 박물관에서 우연히 만나 친해졌고 점차적으로 좋은 감정을 쌓게 됩니다. 하지만 리자와 애니가 서로 좋아한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면서 시련이 시작되는데요. 소설 후반에 주인공들을 더 적대시하게 되는 것은 어느 정도 교양을 쌓고 교육을 받은 리자 주위의 사람들이에요. 리자와 애니가 친구 이상의 사이라는 것을 알아채자 리자에게 성적인 뉘앙스를 품은 바보 같은 질문을 하거나 여자애들이 리자를 따돌리는 것, 그의 남동생을 괴롭히거나 리자를 비난하는 행위를 하는 것은 그 교양 있는 학교와 잘 사는 집안의 사람들입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 사람들은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울타리 안에서 결속을 다질수록 배타성도 강해지는 경향이 있지 않나 싶었습니다. 자신들을 지켜주는 울타리가 사소한 것으로도 깨지거나 바뀌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실제로 세상에 완벽한 울타리는 존재하지 않는 법이고 소설 속에서 리자와 애니가 서로 좋아한다고 해서 그들의 평화가 깨어지는 것도 아니었고요. 소설 속에서 리자는 자기가 동성애적 성향을 가졌다는 이유로 자신을 건들 거라고 착각하며 자신을 피하는 여자애들을 기가 차다는 듯 바라보는 씬이 등장하는데, 이게 바로 현실에도 등장하는 가장 큰 편견이 아닌가 싶네요.
결국 소설의 말미에서 동성애자임을 숨겼던 여교사 둘이 결국 축출당하고 리자와 애니도 곤란을 겪게 되지만 이 둘은 끝까지 자신들의 감정을 지켜가면서 소설은 마무리됩니다. 흔히 미국하면 우리나라보다 훨씬 개방적이고 성적으로 자유분방할 거라고 많이 생각들 하지만 이것도 일종의 편견이며 지역에 따라 미국도 극도로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곳과 그런 성향의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하더라고요. 특별한 선진국이 아닌 이상 사람 사는 곳은 대개 비슷할 듯한데 낸시 가든의 이 소설만 하더라도 불태워지는 수모를 여러 번 겪기도 했다고 하더군요. 『소녀, 소녀를 사랑하다』는 미국의 사회상과 사람들의 모습까지 그려내면서 소설 내외적으로 많은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소설인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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