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비』는 개봉 전부터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적당한 타이밍에 극장에서 감상했던 영화였습니다. 일단 영화상에서도 수시로 언급되듯 '바비'는 마텔사의 대표적인 인형 상품이고 여자아이들의 대표 완구지만 실제로 가진 적은 없어요. 아무래도 한국에서는 미미나 쥬쥬 인형이 더 친숙한 입장이라... 그래도 일단 영화가 전해주는 메시지에 관심이 있던 건 사실이고, 영화에 관해서 먼저 본 것은 유튜브에 올라온 예고편과 어쩌다 본 스포일러 '영화의 빌런은 OO'이라는 사실 정도였습니다.
예고편만 봤을 때 빌런에 해당되는 캐릭터는 개그 캐릭터로 존재감을 자랑하는 인물 같아서 어떻게 빌런이 되는가 의아했는데 영화가 그 부분을 재미있게 풀어나가더라고요. 그리고 제일 궁금했던 건 어떻게 인형인 바비가 현실로 들어오게 되는지였는데 영화 속 바비랜드는 마텔사에서 나온 인형들 세계이면서 현실과 밀접하게 연결된 공간이라는 설정이 등장하더라고요. 바비(+켄)들은 자신들이 인형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으며 인형 주인의 행동에 따라 바비의 현 상태도 달라진다는 어찌 보면 흔하지만 독특한 설정이었습니다.
인형들에게 생명이 있다는 데서 픽사의 『토이 스토리』 세계관이 생각나기도 하는데 제가 바비 인형(+켄)에 대해 제대로 인식한 건 『토이 스토리』 3편이었다는 점이 떠오르더라고요. 하지만 『토이 스토리』 세계관과 달리 영화 『바비』의 바비랜드는 현실과 다른 포털로 이어진 인형들의 세상이며 거기서 살고 있는 인형들은 자신들의 컨셉 - 예를 들면 주인공 바비는 가장 전형적인 바비이고, 대통령 바비, 기술자 바비, 작가 바비(+켄들)들이 있어 자신들의 컨셉에 충실하다는 점인데요.
이 영화에서 인상 깊었던 점은 이야기를 끌고 가며 변화를 감지하는 인물이 가장 '전형적인 바비'라는 점입니다. 다른 인형들과 달리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발뒤꿈치가 땅에 붙거나 셀룰라이트가 생기는 등 현실적으로 변한 바비는 자신의 변화에 당황하며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합니다.
바비에게 이런 변화가 생긴 이유가 바비의 현 주인에게 뭔가 심각한 변화가 생겨 서로 영향을 주게 된 것이라고 판단한 '이상한 바비(제일 예쁜 바비인데 주인이 험하게 갖고 노는 바람에 망가진 바비, 그런데 작중 묘사를 보면 나름 힙하다고 할 수 있는 인상의 바비)'는 포털을 지나 현실에서 주인을 만나야 한다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비는 자신은 어드벤쳐 바비가 아닌 전형적인 바비이며 이런 변화에 익숙하지 않다며 모험을 거부하려 하고, 현실 세계에 도착했을 때는 자신들의 세계와 너무 다른 모습에 좌절하며 눈물을 흘리기까지 합니다. 거기다 후반부 특정 인물에 의해 바비랜드가 뒤집어졌을 때 의지가 무너져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리더십 있는 바비'가 나타나 이 상황을 해결해 주길 바라는 등 수동적이고 우울한 모습을 보이기까지 해요.
그리고 이런 바비를 이끌어주는 것이 바로 현실에서 바비의 주인들이라고 할 수 있는 글로리아와 사샤 모녀였으며, 마텔사의 직원이었던 글로리아는 바비에게 현실의 여자들처럼 기준과 틀, 코르셋대로 바비가 따를 필요가 없다는 점을 역설합니다. 전형적인 바비가 다른 바비들과 달리 현실적인 사고에 눈을 뜬 것도 글로리아의 영향이었으며 영화 『바비』는 '전형적인 바비'가 자신에게 주어진 틀을 박차고 성장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었어요.
바비가 바비랜드와 다른 현실에서 겪는 곤혹(캣콜링 같은 장면)이나 바비가 현실에 등장한 걸 알고 당황한 마텔사의 임원과 직원들이 바비에게 문제를 일으키지 말고 상자로 들어가라고 압박하는 장면은 어떤 의미에서 현실의 여성들이 겪는 일들을 대놓고 은유하는 장면이기도 했고요.
이 현실로 향하는 모험에서 바비가 원하지 않았음에도 켄이 따라오면서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데요. 바비랜드에서 켄은 그저 켄일뿐이지만 현실에서 가부장제의 개념을 접한 켄은 막판에 바비랜드를 자신들(켄들)이 주인공인 '켄덤랜드'로 바꾸고 바비의 저택을 빼앗으며 기존 바비들을 켄을 위한 들러리와 메이드 등으로 격하시키는 등 거한 사고를 치게 됩니다.
의외로 빌런처럼 등장했던 마텔사 임원들은 우스꽝스럽고 편견에 가득 찬, 그러나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한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들에 불과했으며 바비의 대립자로써 극을 이끌어가는 인물은 켄이었다고 할 수 있었어요. 영화 속에서 켄의 캐릭터가 인상적인 건 사실이지만, 솔직히 후반 하는 짓을 보면 그냥 멋있는 척하고 싶은데 '염병(적당한 말 이것밖에 생각 안 남)'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고요.
솔직히 바비랜드의 켄은 어떤 의미에서 성반전된 세계관의 희생자일 수도 있어서 그의 설정 자체가 일종의 미러링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켄은 바비가 원한 적이 없는데도 자신이 모험에 같이 가길 바란 거라고 허세를 부리며 그녀를 따라갔을 때부터 애가 허파에 바람이 든 것 같은 기미가 보이긴 했거든요. 솔직히 작중에서 켄 하는 짓이 웃기긴 웃긴데 안 웃긴 그런 장면들이 많더라고요.
영화 초반 이 두 인형들은 자신들의 세계와는 정반대로 다른 현실에 당황하고 우스꽝스러운 취급을 받아 잠시 좌절하는 건 비슷했으나 현실의 영향을 받아 이룬 것들은 방향이 달랐으며, 거기에 더해 바비는 사건을 정리하고 나서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기 위한 선택을 하게 됩니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놀라웠던 게 현실로 들어온 바비의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었어요.
중반 바비를 도와준 할머니가 좀 현실과 괴리된 모습을 보여 보통 인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녀가 마텔 창업자인 루스 핸들러의 유령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는 거의 반전을 맛보는 충격이었다고 할까요. (그녀가 마텔사의 창업자이자 탈세로 국세청에 신고당했다는 개그는 덤) 자신의 변화에 망설이는 바비는 현실에서 인간으로 살려고 하는 바람을 그녀에게 고백하는데 여기서 루스는 '자신의 선택에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다'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루스의 이 대사 역시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였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 또한 영화 속에서 바비의 상징색으로 '핑크'가 계속 등장하는데 디즈니의 『겨울왕국』에서 엘사가 푸른색을 여자아이들에게 돌려줬다는 평이 있는 것처럼 『바비』는 '여자색'이라고 폄하 받던 핑크색의 가치를 (개인 호불호와 상관없이) 다시 끌어올리는 시도를 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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